(* 1995년 진급을 위한 논문을 발견하다.)
1. 들어가는 글
우리는 지금 거대한 세계사적 전환을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엄청난 격랑 속에 떠밀려 가고 있다. 한 세기가 끝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1천년기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다가올 제삼천년기를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자신에게 항상 되물어 보아야 할 질문이면서도, 우리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때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시 유대에서 최고의 권력과 지위를 누리던 빌라도에게 진리를 설파하며 감동시켰더라면 아마도 십자가 처형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았을까?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인류가 지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한 대답도 영원히 새롭게 반복되어야 한다는 뜻일까? 아무리 올바른 대답을 해도 로마의 권력을 대표하는 총독이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침묵했을까? 예수님의 침묵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사실, 진리는 인간이 그 궁극적인 실체를 완전히 파악할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라도 언제나 변함이 없고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런가 하는 문제는 둘째 문제이고, 진리가 인간사회와 관련을 맺을 때 가지는 측면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던진 질문은 그 당시 역사적인 상황 안에서 예수님이 외치는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런 질문에는 대답이 여러가지 나올 수 있고 듣는 사람에 따라서 자기 구미에 맞지 않는 대답을 배척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굳이 빌라도의 구미에 맞는 현실적인 대답을 해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빌라도의 질문에 침묵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20세기말을 살아가는 목회자로서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2. 현대사회의 이해
21세기를 4년 앞둔 현대 사회를 ‘후기산업사회’, ‘탈산업사회’, ‘정보화사회’, ‘과학기술혁명의 사회’, ‘하이테크사회’, ‘컴퓨터 사회’, ‘제3의 물결’ 등으로 부르고 있다. 사람들이 현대 사회를 어떠한 이름으로 부르건간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변화의 물결은 과학기술의 변화와 상호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학기술 변화의 밑바탕에는 컴퓨터가 자리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어떠한 분야라도 컴퓨터의 직간접적인 도움없이는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변화될 정치·경제·사회·문화는 어떤 형태로든 컴퓨터의 변화와 맞물려 진행될 것이다. 컴퓨터에 의해 제공되어지는 문화는 현재의 문화이면서, 미래의 문화이다. 3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신세대’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컴퓨터 학습 붐이 일어나고 있고, ‘컴맹’(Com 盲)이나 ‘넷맹’(Net 盲)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다. 대학생 층에서는 이제 컴퓨터와 별 관련이 없는 전공을 하는 이조차 컴퓨터가 없으면 시대적 조류에 뒤떨어짐을 느낀다. 일찌기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에서 곧 컴퓨터에 의거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리라고 예견한 바 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들은 급변하는 시대의 추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변화의 양상과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 채 컴퓨터사회라는 말만 무성하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는 컴퓨터사회의 도래에 즈음하여 좀더 냉철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컴퓨터의 핵심은 과학기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컴퓨터가 문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문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크 엘룰(1990)은 과학기술문화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과학기술문화의 불가능성은 다음과 같은 세측면에서 발견되다는 것이다. 첫째, 과학기술은 지식의 축적을 허용하지 않으며, 새로운 지식에 의한 지식의 무효화를 토대로 발전해 나간다. 하나의 분야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은 이전의 과학기술을 폐기처분하게 만든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더 많은 지식이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다. 그 결과로 “과학지식은 문화를 낳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둘째로는 과학기술을 이용한 다른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인데, 과학기술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문화의 생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과학기술 언어의 전문화(專門化)에 의해서 서로 다른 과학기술은 격리되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한 분야에서 연구한 내용들을 담기 위해서 정리되는 학술언어들은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넷트 워크는 과학기술이 이루는 세계의 매우 두드러진 면모인데, 그것은 역설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만인을 만인에게 연결시킴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의 기회를 모두에게 제공하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보편화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람들 사이를 떼어놓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상호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네트 워크는 결국 물리적 연결의 총체화를 이룸에도 불구하고, 상호작용이 없는 개인들의 모임이다. 이런 상황은 문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룰은 과학기술과 문화는 극단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둘 사이를 이을 교량은 없으며, 이 둘을 연관시키려는 것은 지각없는 일이라고 했다.
만약 과학기술이 문화와 전혀 연관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들은 종교인으로서 과학기술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된다. 필요에 따라 과학기술을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과학기술은 문화와 상호작용을 하며, 오히려 문화를 가능케 하는 핵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과학기술과 함께 사람은 자연의 순환으로부터 독립하여 문화를 창조한다. 사람의 손이 가해진 것, 인공적인 것, 그것이 문화이며 곧 기술이다. 거꾸로 말하면 기술은 아트(art)요, 아티피셜(artificial)한 것이며, 그 자체가 문화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 문화란 언제나 기술문화인 셈이다. 우리는 과학기술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과학기술문화란 함은 그 문화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과학기술이라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에까지 깊숙히 침투하여 상당히 일반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신적인 영향력에서 보편적인 문화현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대의 과학기술의 핵심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컴퓨터이다. 이러한 점에서 컴퓨터가 일으키고 있는 문화적인 현상과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컴퓨터가 종교적인 고찰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문화현상으로서의 자리를 굳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란 언제나 그 시대의 문화의 틀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고, 신앙을 전달하게 될 때는 그 시대의 상징체계, 곧 그 시대의 문화언어를 가지고 초월성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신앙은 언제나 문화적인 모습을 띠게 마련이며, 오늘날 컴퓨터 문제를 고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상징물로서의 컴퓨터를 생각하기 이전에 산업시대의 상징물로서의 시계를 생각해보자. 루이스 멈포드가 말했듯이 ‘시계는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계이다. 시계란 대부분의 인간 경험에는 낯선 기계적 시간체계이다. 1세기 전까지만해도 사람들은 추상적으로 분절된 시계의 움직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고투의 긴급성에 따라 시간을 측정하였다. 생활의 리듬은 일일 주기 - 새벽의 수탉 울음소리로 시작되고 밤에 닭이 잠들면 마감된다 - 속에서 이루어지는 동물사육, 파종, 수확 등의 작업과 계절의 연주기(yearly cycle)에 따라 형성된다. 그러나 시간이 기계적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이 변화되었다. 발전의 매 단계마다 시계는 두드러진 현시적 존재였고, 기계의 전형적인 상징이었다. 오늘날에도 시계보다 널리퍼져있는 기계는 없다. 사람들이 시계에 따라 먹고 자고 일하므로 시계는 ’정의적 기술‘이라 불려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시계는 삶을 규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되었고, 정확성의 상징이 되었으며,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시계와 서구의 세계관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글들이 쓰여졌다. 하나님조차도 질서정연하고 잘 조정된 우주를 만든 신성한 시계 제작자로 간주되었다. 컴퓨터는 정보화 사회의 상징이다. 미래 학자 데이비드 볼터는 컴퓨터가 논리, 시간, 공간, 그리고 언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주된 기술적 은유이다. 컴퓨터는 이전 시대의 기계가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인간 지성의 다재다능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일으키고 있는 문화의 핵심은 컴퓨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생산과정을 형성하는 정신, 생산품을 이용하는 정신, 곧 영성에 있다.
3. 현대 사회의 순기능과 역기능
한국은 1994년을 기점으로 정보사회에 진입하였다고 한다. 정보사회는 정보 산업 관련 종사자의 숫자가 기타 부문의 종사자의 수를 능가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런 기준에서 보면 한국은 정보화 초기 단계에 있는 셈이다. 최근 5년 동안 사무 자동화 부문, 제조 분야, 멀티 미디어 분야, 정보 통신 분야의 기술 발전과 축적, 보급 속도는 우리 국민들도 향후 5년 이내에 본격적인 정보 사회에 살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정보화는 그 동안 서서히 가정, 학교와 직장 그리고 시장에서 우리의 생활양식을 변모시켜왔고, 마침내 사고 방식과 종교에도 영향을 미쳐왔다.
좁은 의미의 정보사회는 컴퓨터와 통신이 결합되어 정보의 축적, 처리, 전달 능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면서 정보의 가치가 산업사회에서 물질이나 에너지 못지않게 중요해지는 사회를 말한다. 그래서 정보와 지식이 중요한 재화가 되고, 정보 통신 기술이 가정, 기업활동, 행정 등 인간의 여러 활동 분야에 도입되어 사회 환경, 생활과 인간 의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가 사회를 컴퓨토피아(computopia)로 만들 것인지, 컴퓨포비아(compupobia)로 만들 것인지는 진지하게 질문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질문은 아직 단정적으로 대답을 내릴 수 없다.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제도나 기술이 순기능과 역기능의 양 측면을 다 가지고 있으며, 순기능으로 보였던 측면이 쉽게 역기능으로 바뀌어 온 것을 역사를 통해서 체득하여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앞으로 컴퓨터가 지배하는 정보사회가 진행된다면 구조적 속성상 역기능의 측면이 더 커질지 모른다는 비판적인 예측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들이다. 그러면 먼저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정보 사회의 순기능과 역기능 그리고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⑤ 여성을 천대하는 기존의 교회 구조와 교리적 경직성은 앞으로 이들 계층의 도전에 부딪힐 것이다.
⑩ 집단 내의 정보 격차와 국가간 정보 격차를 줄일 수 있는 정보의 분배 정의를 위해 교회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다.
고재식, 기독교 윤리학 방법론,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김진식외, 해커들의 해킹기법, 연암출판사, 1993.
뉴스위크, “첨단기술의 발전은 우리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문제점은 무엇인가, 1995 3․1.
다니엘 벨, 정보화 사회와 문화의 미래, 디자인 하우스, 1993.
데이빗 라이언, 실리콘 쏘사이어티, 임일택 역,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출판부, 1992
박문수, “정보사회와 교회”, 월간 사목 1995년 5월호.
앨빈 토플러, 전쟁과 반전쟁, 한국경제신문사, 1994.
양명수, 호모 테크니쿠스, 한국신학연구소, 1995
존 나이스비트, 메가트렌드2000, 한국경제신문사, 1992.
한국 전산원, 1994 국가정보화 백서, 한국 전산원, 1994.
한스 큉, 세계 윤리 구상, 안명옥 역, 분도출판사, 1992.
* 이 논문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득한 옛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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